본문 바로가기
자기경영

홍보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네이스 배울것이 너무 많다.

by planner_l 2023. 7. 2.
반응형

에드워드 버네이스라는 이름은 몰라도, 베이컨이 미국의 아침식사로 자리매김하게 된 광고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홍보의 창시자', '홍보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생애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1891년 11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라이 버네이스는 유대인이며 어머니는 안나 프로이트로,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동생이다. 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자랐고 코넬 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했다. 농학을 전공한 이유는 곡물상인 아버지가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곡물 유통업무를 하다가 그만두고 친구의 의학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홍보 업무를 시작했고 이때 본인의 적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에 맞서 뛰어난 선전 전략을 펼쳤고 1919년 전후에는 PR(홍보) 전문 사무실을 열었다. 대중심리학에 자신의 외삼촌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결합한 방법론을 홍보에 이용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1995년 3월 9일 103세에 세상을 떠났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홍보(광고) 전략 사례

여성 머리망

1920년대에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감싸는 머리망을 만들던 '베니다 헤어넷' 회사에서 버네이스에게 판매촉진 전략을 의뢰하였다. 그동안은 예쁜 모델을 기용하여 예쁜 광고를 찍어왔지만 판매량 증가로 이어지지 않자 버네이스에게 의뢰한 것이다. 버네이스는 당시 이슈였던 뉴욕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사고에 주목하였다. 이 사고는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던 146명의 여성이 단 15분 만에 사망한 사고였다. 이 사고로 인해 미국에서 '안전'에 대해 집중하고 있던 시기였고 버네이스는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여성노동자들에게 위험하다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긴 머리카락이 기계에 휘말려 들어가면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전파한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머리망을 구매하였고 이는 곧 유행이 되었다. 나아가 정부에서 여성근로자들은 공장에서 머리망을 착용해야 한다는 법이 통과되기까지 하였다. 물론 베니다 헤어넷의 매출은 급상승하였다.

 

아이보리 비누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이보리 비누는 1897년에 출시되었고 물에 뜨는 비누로 인기를 끌었다. 성장을 계속하던 중 시장이 포화상태에 다다랐고, 제조사는 버네이스에게 연락하였다. 버네이스는 비누가 가장 필요하지만 비누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있다고 보았다. 아이들이 비누에 친숙해진다면 시장규모가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버네이스는 '비누 조각품 경연대회'를 열었다. 첫 번째 대회는 예술가들에게만 참가의 자격이 주어졌다. 수상작은 각지에 순회 전시되었고, 사람들이 비누 조각품을 예술작품으로 여기게 되었다. 두 번째 대회는 예술가와 초등학생으로 참가자격을 확대하였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참가시켰고 비누조각에 열광했다. 조각을 위해 아이보리 비누를 샀고, 비누에 대한 아이들의 거부감을 없애는 것으로 비누판매시장은 확대되었고 당연히 매출도 상승하였다. 버네이스의 뛰어난 점은 첫 번째 대회에서 예술가들에게만 참가자격을 준 것이다. 만일 처음부터 아이들까지 참가대상이었다면, 비누조각품에 대한 동경이나 욕망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 흡연 캠페인

1929년 아메리카 토바코(미국의 담배회사)에서는 담배의 매출을 확대하기 위하여 버네이스를 고용하였다. 버네이스는 담배 시장이 성장하려면 이미 흡연의 비율이 높은 남성보다는 여성을 타깃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하는 행위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버네이스는 이런 상황을 여성해방운동과 연결 지었다. 그래서 여성 운동가들을 설득해 뉴욕 5번가에서 시위를 하는 동안 러키 스트라이크 담배를 '자유의 횃불'처럼 들고 있게 했다. 또한 '여성들의 노상 흡연을 허락하라!'와 같은 슬로건을 제작하였다. 이와 같은 장면은 미국 주요 신문들의 1면을 장식했고, 여성 흡연에 대한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버네이스는 여성이 흡연함으로써 더 강해지고 독립적인 주체가 된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물론 흡연은 건강을 해칠 뿐이지만 흡연을 함으로써 여성들이 더 '독립적인 기분'을 맛볼 수 있게 만들어 담배의 판매량을 늘린 것이다.

 

과테말라 쿠데타

기업의 의뢰를 받아서 한 국가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친 사례이다. 1950년 진보 계열인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이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미국의 과일 회사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지금은 치키타)가 경작하지도 않으면서 소유하고 있던 땅 40만 에이커를 압수하였다. 과테말라 정부에 적개심을 가지게 된 프루트 컴퍼니는 버네이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의뢰를 하였다. 버네이스는 먼저 좌파 정권의 위험성만을 부각한 보도자료를 미국언론에 제공하고 기자들이 과테말라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쓰도록 현지 취재 비용을 후원하였다. 과테말라 정부 지도자들의 언어를 분석하니 그 단어들이 소련 선전 메시지와 비슷하다는 학자들의 조사 결과도 만들어냈다. 이러한 선전활동으로 미국에서 과테말라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으로 형성되었고 결국 CIA가 반정부세력과 함께 과테말라의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때 버네이스는 반군을 '자유의 군인'이라 불렀다. 버네이스 때문에 과테말라정권이 무너졌다고 표현하는 건 어느 정도 비약이 심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과테말라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마무리

버네이스의 저서 '프로파간다(Propaganda)'에서 자신의 선전 방식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어떤 상품을 선전해야 한다면 기존의 선전 방식은 그 상품 자체에 대해 홍보를 했다. 하지만 버네이스는 그 상품을 사용해야 하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선전을 한다. 미국인의 아침식사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한 베이컨과 달걀 한 접시 역시 이런 버네이스의 선전의 결과라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다.

버네이스의 이와 같은 통찰력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미국의 주부뿐만이 아니었다. 나치의 선전 장관으로 유명한 괴벨스가 버네이스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1923년에 출간된 '여론 정제'라는 저서는 괴벨스가 독일 내 반유대주의 여론을 끌어올리는 것에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버네이스가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긴 했지만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버네이스의 선전 방식이 계기가 되어 기업은 상품을 만들고 시장에 공급하는 제한된 역할을 벗어나 시장 자체를 만들어내는 주체로 변모하였다.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이 정말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필요하다고 느끼게' 만들어 구매를 유도하는 전략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반응형